본문 바로가기
작가회랑

와룡생臥龍生

by 와룡씨 2007. 2. 6.

와룡생, 본명은 우학정,  1930년에 출생하여 1999년에 세상을 뜨다. 향년 69세.
 
--- 무협소설의 새로운 규칙을 창립하다
 
   와룡생은 무협소설속에서의 이름이다.
   50년대 무협소설은 대만에서 중흥을 이루었는데 와룡생은 그중 관건이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쓴 무협소설뿐 아니라 그는 대만사회의 무협소설작가로써, 그의 작품은 시대의 흐름에서 부침을 거듭하고 한편으로는 전기를 채웠으며 한편으로는 전형을 뒤엎었다.

   와룡생은 대륙의 하남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기전 군에 들어갔다. 1948년 부대를 따라 대만에 왔다. 그는 정식으로 학문을 한것도 아니며 학교에서 무슨 문학적 지식을 배우지도 못했다. 더욱이 당시의 문학조류는 너무나도 황폐했다. 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것은 바로 <칠협오의> <남녀영웅전>등 고전 협의 소설과 환주루주, 정증인, 주정목등의 근대 무협소설이었다. 그는 군에서 대강의 서양문학을 접했으며 이를 읽고는 기억하곤 했다. 필경 <금은도> <협은기> <기독산은구기> 등의 내용에 감복하였으며 환상이 농후한 통속작품에 빠져들었다.
 
--- 와룡생식 마음 사로잡기
 
   와룡생은 환주루주등이 쓰던 구무협소설에 익숙해져있지만, 그가 받은 교육은 그에게 구소설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무협소설에서 진행한 중대한 변화는 하나는 문장을 간결히 한 것이다. 더욱 명확한 백화문을 사용하고 더욱 명쾌한 구법과 단락을 써서 다시 평강불초생을 쓴 상상의 강호에 풍파를 일으켰다. 두 번째는 즉 원래의 구 무협에서 나온 각인 각파를 늘이고 변화시켰으며 정리하여 이른바 무협소설의 '새 규칙'을 만들어낸 것이다.
와룡생과 함께 '새 규칙'을 만들어낸 사람으로 제갈청운, 사마령등이 있으며 이후에 동방옥, 상관정 들이 이어갔다. 이 '규칙'은 대만 무협소설계를 제패하였으며 20년동안 지속되었다. 고룡이 일어나 특이한 재능으로 '또다른 형식의 무협'을 써내고, 또 홍콩에서 김용의 작품이 크게 일어나 대만으로 밀려오자 모범과 표준이 또 변화하였으며 와룡생식의 무협은 다시 몰락했다. 와룡생식 무협의 기본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몇부는 50, 60년대에 아주 이름을 떨친 작품이 되었다.
예를 들면 <비연경룡>, <철적신검>, <천향표>, <강설현상>등이다. 다른 것으론 <쌍봉기> <옥차맹>등 작품들이 여러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찍혀졌다. 와룡생식의 무협은 중요한 원소가 있으며 결점도 있다. 먼저 줄거리는 필히 무림존망의 위급한 사건에 영향을 받아햐 하며 무림은 복잡한 방파와 조직이 합쳐져 생겨난 것이며 각방과 각파의 과거는 은원에 물들어 있으며 합종연횡을 거듭하여 큰 사건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큰 사건을 위해서는 오직 영웅이 있어야 하며 또 영웅은 필히 젊은층이다. 이런 작품은 소년영웅을 탄생시켜 그가 어려움을 당해 그것을 헤쳐나가는 특수한 '천로역정(pilgrimage)'이다. 작품에는 보통 많은 이기기 힘든 인물이 등장한다. 등장 인물중에는 물론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이외에 또 정상인도 있고 이상한 사람도 있다. 주인공은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 혈육, 사랑하는 사람, 사부, 형제등등 나쁘고 좋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정상인이다.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싸움을 하는 인물들은 왕왕 무공이나 성격이나 모습등에서 기괴하고 이상하다.
영웅은 연공을 하는 것 외에도 미녀들의 환심을 얻는다. 남자 주인공은 한명이고 그에 대응하는 여자 배역은 아주 많아야 한다. 또한 정사와 성격의 미추를 떠나 젊은 여자들이어야 한다. 모두 아름다우며 남자주인공에게 반한다.
 
다른 조건은 영단 묘약, 기문진법, 독문병기등이며 또한 경락혈도를 묘사하거나 설명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것들은 종종 어떤 가정의 비밀이며 배후에는 어떤 비극이 있기 마련이다.
 
---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들다.
무협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이런 내용들을 쉽게 볼수가 있다. 그들은 원래 여러 내력이 있으며 와룡생과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으나 이제는 공식이 되었다.
공식을 뒤엎은 이후 이어 다른 공식이 적극적으로 생겨난다. 1956년에서 73년까지 와룡생은 30부의 작품을 썼으며 각 편이 평균적으로 모두 60만자 정도였다.
이런 수량을 볼때 와룡생이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고 여기겠지만 와룡생에게 진정한 부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책을 내어 번 돈은 왼손으로 들어와 오른손으로 나갔다. 재물의 개념이란 어떤 수단이 아니며 종이위에서 번 돈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 이 방면에서는 와룡생과 고룡 및 기타 무협소설 작가들이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모두 간단하고 흑백이 분명한 소설을 썼는데 자신들의 개성에 어떤 이해하기 힘든 천진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설을 쓰면서 악불군이나 위소보같은 개성이 굴절된 캐릭터를 쓰지 않았으며 역시 현실속에서도 김용처럼 영광을 얻을 <명보> 사업같은 것은 할줄도 몰랐다.
와룡생은 이후에 드라마 제작인이 되었다. 가장 성공한 작품은 소왕야 진려려의 <강남유>였다. 그러나 방송단의 복잡하고 간험한 생활은 필경 와룡생에게 쉽게 적응할수 없게 했을 것이다.
돈을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는 진리아래 와룡생은 비단 다시 무협소설을 쓰려고 했으며 더욱이 적은 돈을 위해 출판사에 그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결과 시장에서 와룡생의 작품은 100편 이상을 볼수 있게 되었다. 그 100부 중에 진정한 와룡생의 작품이 몇부인지는 증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와룡생은 특별한 예가 아니다. 성공한 무협소설 작가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배후에 우리들이 대중문학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과 작가 자신들조차 존중하지 않았기에 대중문학은 역사에 충실한 기록의 가치도 없었다. 해서 방대한 '와룡생작품' 목록을 대하며 우리는 진위를 밝히기 힘들며 전후의 연대를 정리하기도 힘들다. 대만 대중문학과 와룡생과 같은 전후배 대만 무협 작가들을 위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