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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회랑/대인물

[대인물] 2장, 108번의 칼

by 와룡씨 2007. 8. 31.

대인물 - 고룡

108번의 칼(一百零八刀)

(1)

전사사는 금실로 짠 양탄자가 깔린 상비죽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창 밖으로 짙은 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바람 속에 연꽃의 맑은 향이 실려 왔다. 그녀의 손에는 벽옥으로 만든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바로 이 그릇 안에 얼음으로 차갑게 한 연자탕(蓮子湯)이 들어 있었다.

이 얼음은 멀리 100리나 되는 관외에서 빠른 말을 달려 운반해 온 것이었다. ‘금수산장(錦繡山庄)’에도 얼음고가 있지만 전사사는 관외에서 가져온 것을 좋아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관외에서 가져오는 얼음이 좀 더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달이 네모라고 말한다한들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전대소저가 좋아하기만 하면, 그 무엇을 하든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진원후(鎭遠侯)의 후손인데다 ‘중원맹상(中原孟嘗)’ 전백석(田白石) 전 둘째나리의 무남독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가 너무나도 부드럽고 달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김새는 물론이요, 말하는 것, 웃는 것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그 누구든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단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이라면 이 달콤한 미녀를 볼 기회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매년 원소절에 전 둘째나리가 화등을 켤 때 함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뿐, 평소에는 늘 깊은 규중에 들어앉아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전 둘째나리는 ‘중원맹상’이라는 별호답게 결코 소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천금을 쥐고 흔들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대범한 인물이었지만, 딸에게만은 엄해서 누구도 접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딸을 세상에 있는 모든 보물들보다 백배 천배 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

연자탕은 알맞게 차가웠다. 전사사는 연자탕을 가볍게 한 모금 들이킨 후 시녀인 전심(田心)에게 건네주었다.

전심은 그녀의 시녀일 뿐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전사사에게는 유일한 친구였다. 전심이 없었다면 그녀는 무척이나 외로웠을 것이다.

전심은 지금 맞은편 작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수를 놓고 있었다. 금빛 화로의 용연향이 점점 꺼져갔다. 바람이 불어 사춘기 소녀의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갑자기 전사사가 전심이 들고 있던 바늘을 빼앗고는, 약간 토라진 듯이 말했다.

“이제 수놓는 것 좀 그만할 수는 없니? 네가 수놓은 베개를 예물삼아 시집갈 사람은 없단 말이야.”

전심은 빙긋 웃으며 희디흰 손을 허리에 살짝 올려 놓았다.

“수를 놓지 않으면 뭘 하라구요?”

“나랑 얘기나 해.”

전심이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하루종일 떠들어놓고 더 할 얘기가 남았어요?”

전사사는 눈빛을 반짝였다.

“재미있는 얘기 좀 해줘.”

금수산장에는 항상 손님이 들끓었다. 전심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손님들의 입에서 여러 가지 무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는, 돌아와서 아가씨에게 들려주곤 했다.

“요 며칠 사이의 손님들은 모두 멍청이였어요. 얘기는 하지도 않고 미친 듯이 술만 마시지 뭐예요. 적게 마시면 본전도 못찾는다는 식이었어요.”

전사사는 눈을 빛냈지만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지난번 했던 호구의 싸움 얘기를 다시 한번 해 봐.”

“그건 잊어버렸어요.”

“잊었다고? 벌써 일곱 번이나 얘기해놓고 어떻게 갑자기 잊는다는 거야?”

전심은 더욱더 입을 뾰죽 내밀며 얼굴을 굳혔다.

“그래요, 벌써 일곱 번이나 얘기했으니 아가씨도 잊을 수가 없겠죠. 그런데 왜 또 듣겠다는 거예요?”

전사사는 얼굴을 붉히며 들고 있던 바늘로 시녀의 입을 꿰어 놓으려 달려들었다. 전심은 깔깔 웃으며 몸을 피했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은 후 큰 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우리 아가씨. 듣고 싶으시다면 얘기해드리지요. 아가씨가 즐겁기만 하다면 백번을 얘기해도 상관없어요.”

전사사는 그제야 전심을 용서해주었다.

“빨리 말해. 아니면 그 작은 입을 꿰매놓고 말테야.”

전심은 의자에 앉은 후, 일부러 헛기침까지 하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구의 싸움은 바로 진가 진소협이 이름을 날리게 된 일전이었지요. 70년 간, 강호의 그 어떤 싸움도 호구의 일전보다 더 파란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그 어떤 싸움도 호구의 일전보다 피를 많이 흘리지 못했어요.”

이 이야기를 벌써 몇 번이나 했기 때문에, 마치 늙은 학자가 경을 외는 것 마냥 졸면서도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사사는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욱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전심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날은 5월 5일 단오절이었죠. 매년 단오절에 강남칠호(江南七虎)는 호구의 산에서 모임을 가져요. 여기서 말하는 칠호라는 것은 호랑이는 아니지만, 호랑이처럼 사람의 살을 발라 먹는 자들이예요.”

전사사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무척 두려워하겠구나?”

“물론이죠. 무척이나 두려워했지요. 그래서 모두들 호랑이를 잡을 영웅이 되고 싶어 했지만, 그들이 호구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찾아가지 못했어요. 그런데 5년 전 단오날이었어요...”

“그 날은 어땠어?”

전사사가 다시 끼어들었다. 이미 익숙한 얘기인지라 언제 끼어들어야 전심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전심이 대답했다.

“그날 일곱 호랑이는 호구산에 오르다 우연히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먹이를 만난 듯 마음이 동해 이것저것 따져보지도 않고 그녀를 납치해갔지요.”

“그녀가 누구인지는 몰랐고?”

“물론 그들은 그 여자가 진가의 연인이라는 걸 전혀 몰랐죠. 그야 알았다고 해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지금까지 한번도 그들을 건드린 자가 없어서, 칠호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번엔 제대로 만났구나.”

“그 당시 진가는 유명하지 않았죠. 그가 그토록 대담할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그가 산에 올라가 호랑이들을 잡겠다고 했을 때, 모두들 허풍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죠. 진짜 올라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거예요.”

“그 사람 혼자만 갔어?”

“당연히 혼자였죠. 그는 단기필마로 호구산에 올라가 칠호를 만났죠. 그들 중 두 명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그 자신은 108번이나 칼에 찔렸어요.”

“108번이라고?”

“그래요, 딱 108번이었죠. 이건 그 호랑이들의 규칙이에요. 칠호는 사람을 죽일 때 단칼에 통쾌하게 죽이지 않고 딱 108번 칼질을 해서 천천히 죽어가도록 만들죠.”

전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108번의 칼질을 견뎌낼 사람은 거의 없겠구나.”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아무도 없었죠. 그렇지만 우리의 진가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어요.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복수를 해야 하니까.”

“그래도 복수를 하려고 했니?”

“진가는 몸만 쇳덩이처럼 단단한 게 아니라 심장도 단단했어요. 이번에 요행히 살아 돌아왔으니 앞으로는 호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 거라고 모두들 생각했죠.”

전심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다시 호구산으로 가서 칠호를 만났지요. 이번에는 네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어요.”

“그는 어떻게 됐어?”

“이번에도 108번 칼에 찔렸어요. 칠호의 공격은 지난번보다 훨씬 무서웠죠. 그렇지만 그는 또 견뎌냈어요. 훗날 그를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108번 칼에 맞은 그의 몸에는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대요. 피를 너무 흘려 호구산의 돌멩이가 모조리 붉게 물들 정도였지요.”

전사사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 호랑이들은 왜 그를 죽이지 않았을까?”

“그것이 규칙이니까요. 108번을 찌른 후엔 결코 더 찌를 수가 없어요. 더욱이 첫 번째 찌른 것과 마지막은 힘도 똑같아야 하죠. 그들 역시 108번 칼에 맞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곤 생각지도 못했지요. 더욱이 그 자가 다시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죠.”

“그렇지만 진가는 216번이나 맞은 거잖아.”

“다 합치면 324번이지요.”

“어째서?”

“3년째에도 가서 108번을 맞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엔 호랑이 다섯에게 상처를 입혔어요.”

“그런 사람인데도 칠호는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았단 말이야? 왜 또 살려준 거지?”

“그 때 그들의 상황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 마냥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 사건이 강호에 일대 파란을 불러 일으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겠다고 호구산에 몰려들었거든요.”

“그래서 108번에 진가를 죽여야 했구나. 108번을 다 찌르고 난 후에는 더 공격할 수가 없었던 거야.”

“맞았어요. 칠호 같은 자들이니 강호인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 깎이는 짓을 할 수 없지요. 그렇게 되면 이전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요.”

“그치만 말이야, 그들 중에 다섯이나 상처를 입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그 틈을 타 그들을 없애버리지 않았을까?”

전사사의 질문에 전심이 대답했다.

“그건 진가가 무척 힘들게 견뎌왔고 또 엄청난 고통을 치렀다는 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모두들 진가가 공을 세워 직접 칠호를 처치하기를 바란 거예요. 324번만 맞으면 끝이니까요.”

그녀의 눈동자에서도 빛이 났다.

“그리하여 최후의 칼을 맞은 후 진가가 여전히 살아 있는 걸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그것이 최후의 칼질이라는 걸 칠호는 몰랐던 걸까?”

“그야 그들도 속으로 세고 있었죠. 그래서 3년째엔 많은 조력자를 구해 산으로 초청했어요.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죠.”

“그리고 4년째엔 어떻게 되었니?”

“4년째엔 칠호의 조력자가 더 많아졌어요. 그렇지만 칠호의 친구들도 진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누구하나 칠호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진가가 마지막 한 사람을 쓰러뜨리자 환호성이 호구산이 떠르르 울렸죠. 10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대요.”

전사사는 향에서 피어난 연기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목에 붉은 손수건을 두른 흑의의 청년이 연기 속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와 사람들의 환호에 미소로 답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전심이 말했다.

“그때서야 진가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떠올랐어요. 자신이 넘치면서도 고통스러운 웃음이었지요. 연인이 벌써 죽었기 때문에 그 영광스런 날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 후, ‘철인(鐵人)’ 진가의 이름은 강호에 널리 퍼졌어요.”

전사사도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정말이지 위대한 대인물이야.”

“진가처럼 용감하고 다정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을 거예요.”

갑자기 전사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전심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난 그에게 시집을 가야겠어.”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단단히 결심한 듯 흥분한 그 표정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전심은 ‘푸하하’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진가에게 시집을 가겠다고요? 도대체 몇 명에게나 시집가시려고요?”

그녀는 손을 꼽으며 말했다.

“제일 처음엔 악환산(岳環山)에게 가겠다고 했고, 다음엔 유풍골(柳風骨), 그리고 이젠 진가라니, 대체 누구에게 시집가실 거예요?”

“가장 괜찮은 사람에게 갈 거야.”

전사사는 눈동자를 굴리며 얼굴을 붉혔다.

“네 생각엔 그 세 사람 중 누가 제일 나은 것 같니?”

전심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모두들 위대한 대인물이긴 하지만 아직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걸요.”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역시 얼굴을 붉히며 가볍게 내뱉었다.

“진가는 분명 다정하고 용감하지만, 유풍골은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는데다 모두들 속으로부터 그에게 감복하고 있지요.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다면 결코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 볼 수 있지요.”

“악환산은 어때? 그 사람은 별로야?”

전삼은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안돼요. 그 사람은 나리보다 나이가 어리지 않다고 들었다구요.”

전사사 역시 입술을 씹으며 대답했다.

“나이가 어때서? 사람만 좋다면 70살 노인이라고 해도 그에게 시집갈 테야.”

전심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벌써 아내가 있다면요?”

“아내가 있어도 상관없어. 기꺼이 후처가 되겠어.”

전심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이 똑같이 괜찮은 사람이면 어쩌죠? 한꺼번에 세 명에게 시집을 갈 수는 없잖아요?”

전사사는 마치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잠시 멍하게 서 있더니, 갑자기 전심을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몰래 나가서 남자 옷 몇 벌만 사다 주지 않을래?”

전심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아니, 아가씨. 남자 옷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전사사는 또 다시 넋이 나간 듯 서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이야기, 너도 알지?”

“그 ‘은자궤(銀字几)’ 책도 제가 가져와서 보여드린거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지요.”

전심이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가 집을 떠날 땐 남자로 분장해야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전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을 나가시려고요?”

전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직접 나가서 그 세 사람이 어떤지 살펴봐야겠어.”

전심은 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농담이라니? 어서 가서 옷이나 사 와.”

전심은 이제 웃기는커녕 곧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손까지 모으며 울 듯이 빌었다.

“아가씨, 착한 우리 아가씨.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나리께서 아시면 제 다리를 잘라버리실 거예요.”

전사사는 눈을 흘겨 뜨며 말했다.

“당장 사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네 다릴 잘라 버릴테야.”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생긋 웃으며 전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더구나 너도 이젠 어린 나이가 아니잖니. 너도 나가서 남편감을 찾아보는 게 어떠니?”

전심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펄쩍 뛰며 아가씨를 끌어안았다.

“저도 데리고 가실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너 혼자 이 썰렁한 방에 남겨두겠어?”

놀라서 하얗게 질렸던 전심의 작은 얼굴은 사과마냥 붉어졌다. 그녀는 눈동자를 빛내며 넋이 나간 듯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전사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 세상은 저렇게나 아름답고 저렇게나 넓단다. 특히 강남엔 지금쯤 갖가지 붉고 노란 꽃들이 피어났을 거야. 사람이 태어나 강남에서 안목을 넓히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인생을 헛산 셈이지.”

전심은 꿈을 꾸는 것처럼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의 혼은 벌써 강남으로 날아가 따사로운 강변의 부드러운 버드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다정한 청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열대여섯 소녀에게 꿈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어서 가. 너랑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버진 절대 모르실거야. 우리가 마음에 꼭 드는 사윗감을 데려오면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야.” 전사사가 재촉했다.

전심의 마음도 그와 같았으나, 겉으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돼요. 그래도 그럴 순 없어요.”

전사사는 얼굴을 굳혔다.

“좋아, 요 못된 것.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마굿간지기 왕대광(王大光)에게 시집보내겠어.”

‘대광’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얼굴이 무척이나 못생겼을 뿐 아니라 머리마저 볼품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머리는 맨들맨들한 달걀처럼 터럭 한 올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은 머리와는 반대로 한 쪽에 최소 삼백뿌리나 되는 수염이 자라나, 비쩍 마른 나무보다 더 거칠었다.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데, 시집을 가야한다고 생각하자 전심은 다리마저 풀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전사사가 유유히 말했다.

“난 하겠다고 하면 꼭 하니까, 어디 가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심이 대답했다.

“가요, 간다고요. 지금 당장 갔다 올게요. 헌데 아가씨께선 위엄 있고 기세등등한 화목란(花木蘭)이 되고 싶으신지, 아니면 서생처럼 부드러운 축영대가 되고 싶으신지?”

(3)

하늘처럼 푸른색의 비단 단삼에 푸른색 문사건(文士巾). 전사사는 그런 차림으로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에 무척 만족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굳히며 도덕군자마냥 점잖은 표정을 지어보이려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입 삐죽이 전심, 지금 내 모습이 마치 탁한 세상을 등지고 사는 미공자 같지 않니?”

전심도 입을 삐죽거리며 웃었다.

“과연 서생답고 풍류가 철철 넘치는 군요. 번안(潘安:옛적 미남자의 이름)이 다시 살아온 것 같아요. 착하게 관 속에 누워있지 않고...”

갑자기 전사사가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한 가지 걱정이 있어.”

“뭔데요?”

“이렇게 생긴 남자가 밖에 나가면, 틀림없이 수많은 아가씨들이 좋아하게 될 거 아냐. 남편감을 구하기도 전에 그 아가씨들이 시집오겠다고 졸졸 따라다니면 어떡하지?”

전심도 눈썹을 찡그리며 정색했다.

“그것 참 큰 문제네요. 아가씨가 여자라는 걸 몰랐다면 나도 시집가려 했을 거예요.”

“좋아. 그럼 널 골라줄게.”

그녀는 몸을 돌려 두 손을 활짝 뻗었다.

“이리 와, 귀여운 아가씨. 꼭 안아서 뽀뽀해 줄게.”

전심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고 달아났다. 전사사가 뒤를 쫓아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싫다 이거지? 그래도 안돼.”

전심이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뽀뽀하고 싶거든 그 모습으론 안 되겠어요.”

“이 모습이 뭐가 어때서?”

“아주 무서운 도적 같아요. 간이 작은 소녀들이 놀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라구요.”

전사사 역시 참을 수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좀 더 부드럽고 자상하게 아가씨의 손을 잡으면서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거예요. 그렇게 마음을 움직이면 아가씨 스스로 품에 뛰어들게 되어 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라는 거지?”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난 매우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오. 지금까지 한번도 당신과 같은 소녀를 본 적이 없소. 당신을 본 순간, 이 세상은 무척 아름답게 변했소. 당신이 없다면 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소’.”

전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사사는 허리를 잡고 넘어갈 듯 웃었다.

“간지럽기도 해라. 남자들은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아가씨가 몰라서 그래요. 소녀들은 낯간지러운 말을 좋아한다구요. 간지러운 말일 수록 더 좋아하죠.”

전사사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경험이 많을 줄은 몰랐어. 벌써 여러번 들은 모양이구나.”

전심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삐죽거렸다.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농담만 하시는군요.”

“좋아, 그럼 나도 진지하게 하나 물어볼게.”

“뭔데요?”

전사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고 작은 입에 뽀뽀를 받아본 적이 있어?”

전심은 침상위로 올라가 이불에 머리를 파묻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싫어요, 듣기 싫어요. 어쩜 그렇게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어요.”

전사사도 살짝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말했다.

“내 나이의 다른 사람들은 여러 번이나 해 본 일일 텐데, 좀 말하면 어때?”

“저것 좀 봐. 그러니 누가 아가씰 바깥출입조차 하지 앉는 귀한 집 규수라고 하겠어요?”

그러더니 전심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 나리 탓이에요. 왜 빨리 시집을 보내지 않으셨을까? 그랬다면 매일처럼 저런 이상한 생각을 하고 계시진 않았을 텐데.”

전사사는 이불을 들춰내고 굳은 얼굴로 전심을 바라보았다.

“요 계집애, 점점 못하는 말이 없구나.”

아가씨가 정말 화가 난 것 같자 전심은 즉시 꼬리를 내렸다. 그녀는 살그머니 침상에서 내려와 아가씨 곁에 서서 빙긋 웃었다.

“방금 한 가지 소식을 듣고 왔는데, 듣고 싶지 않으세요?”

“싫어.”

전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엄청난 소식이에요. 그렇지만 아가씨도 듣기 싫어하시는 데다, 저 역시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어요.”

전사사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엔 참지 못하고 화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가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단 거야? 그렇게 간이 작았니?”

“시녀 따위가 어떻게 간이 클 수 있겠어요?”

그 모습은 정말 두려워서 기가 죽은 것 같았다. 때문에 아가씨는 곧 마음이 풀려 몸을 돌리며 전심을 끌어안았다.

“말 안하겠다 이거지? 좋아, 그럼 정말로 뽀뽀해 버리겠어. 고 작은 입에다...”

전심은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깔깔대며 웃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이것 좀 놓아줘요. 말할게요... 말하겠어요.”

그녀는 겨우 숨을 고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자니 나리께선 아가씨를 양 셋째나리의 아드님과 맺어주실 생각이시래요.”

전사사는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느 양 셋째나리?”

“당연히 대명부(大名府)의 양 셋째나리죠”

잠시 당황한 듯 멍청히 서 있던 전사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서 짐 싸. 오늘 밤 당장 나가야겠어.”

“왜 갑자기 서두르시는 거예요?”

“내가 알기론, 그 양 셋째나리의 아들은 괴물이야. 어려서부터 절간에 들어갔는데, 거기 있던 늙은 스님마저도 그자더러 하늘의 괴물이 환생한 거라고 말했다잖아. 어떻게 그런 자에게 시집을 가?”

전사사는 서둘렀다.

“옷은 내가 챙길 테니 넌 가서 마차부터 구해. 후원 밖에 있는 문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마차는 뭐하시려고요? 말이 좀 더 빠르지 않을까요?”

“가져갈 상자가 예닐곱 개는 될 텐데 마차가 없으면 어떻게 운반할래?”

전심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 많은 상자에다 대체 뭘 넣어 가시려고요?”

“가져갈 거야 많지. 분합이랑 세숫비누, 거울... 이런 것들만 벌써 한 상자야. 남자로 분장한다고 세수를 안 할 순 없잖아.”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이불이랑 베개까지 한 상자. 내가 다른 사람 물건 쓰는 걸 싫어하는 걸 잘 알잖아. 그렇지, 일단 내가 먹던 접시랑 젓가락을 부드러운 천에다 싸 와. 여기 향로랑 바둑판도 싸야지.”

가만히 듣고 있던 전심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 지금 혼수라도 꾸리시는 거예요? 아직 시집갈 곳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혼수부터 챙기다니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