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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회랑/대인물

[대인물] 1장, 붉은 손수건

by 와룡씨 2007. 8. 31.

대인물(大人物)

고룡(古龍)

붉은 손수건(紅絲巾)

(1)

청년의 손에는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칼 손잡이에 묶인 손수건이 바람에 흩날렸다.

붉은 손수건. 막 떠오른 태양마냥 붉은 손수건이었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청년은 이 뜨거운 태양 아래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입고 있는 검은 무명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그는 포위된 상태였다. 포위한 사람은 비록 네 명 뿐이었지만, 얼마나 두려운 인물인지 청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칼을 내던지고 포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칼에 묶여 있는 붉은 손수건을 모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붉은 손수건이 상징하는 그 사람을 모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붉은 손수건은 바로 그의 결심을 뜻했다. 끝까지 싸울 것이며, 죽는 한이 있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붉은 손수건은 그 자체만으로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용기를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칼을 휘두르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선홍빛의 손수건이 춤을 추듯 흩날리는 모습이 빛나는 칼 빛보다 더 눈부셨다.

곧이어 칼날이 상대방의 머리를 베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는 쓰러졌다. 툭 튀어나온 눈은 이 선홍빛 손수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는 이 칼 아래 죽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 청년의 손에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바로 이 붉은 수건이었다. 이 붉은 손수건이 상징하는 용기에 벌써부터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사립문에 기대어 서 있는 소녀의 눈동자는 하늘에 빛나는 별보다도 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소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의 손목에 묶여 있는 손수건이 저녁의 바람을 받아 가볍게 흔들렸다.

붉은 손수건. 연인의 마음마냥 붉은 손수건이었다.

밤은 깊었고 그는 이제 떠나야 했다. 벌써 떠났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다.

손목에 묶인 이 붉은 손수건을 모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붉은 손수건을 묶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소녀도 실망시켜선 안 되는 것이다.

붉은 손수건이 상징하는 것은 용기뿐만 아니라 열정도 있었다. 불꽃과 같은 열정이었다.

그는 결국 몸을 돌려 소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사랑의 밀어는 봄날의 바람보다 더 따사로웠다.

그러나 소녀의 눈은 넋이 나간 듯 그의 손목에 매달린 붉은 손수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는 열정이 식고 말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손목에 묶인 붉은 손수건이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지 말라고 손을 잡았을 때, 그녀가 마음속에 떠올린 사람 역시 자신이 아니라 이 붉은 손수건이 상징하는 그 사람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소녀들이 마음속에서, 그리고 꿈속에서 그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진가(秦歌)였다.

(3)

그는 목욕을 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후 손톱까지 깨끗이 깎았다. 그리고 새로 만든 검은 무명옷을 입은 후, 조심스럽게 허리에 붉은 손수건을 묶었다.

그는 검은 무명옷을 좋아하지 않았고 선홍빛의 손수건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용기도 없고 열정도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호구(虎丘)의 싸움 이후, 강남의 염색점에서는 각양각색의 천들을 모두 붉은 색으로 물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청년들이 붉은 손수건을 몸에 지니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청년이든 붉은 손수건을 가지지 않은 채로는 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더는 청년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청년들처럼 유행을 따르고 싶다면, 붉은 손수건을 몸에 묶으면 되었다. 그것은 곧 그가 아직은 늙지 않았고,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풍류를 즐기는 청년들은 붉은 손수건을 허리나 손목에 감았고, 용감한 청년들은 칼이나 검에 묶었다. 저자거리의 청년들 중에는 머리에 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목에 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붉은 손수건을 목에 두르는 사람은 진가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누군가 붉은 손수건을 목에다 감는다면, 진가는 개의치 않을망정 다른 사람들이 그 손수건과 함께 목마저 잘라버릴 것이다!

누구든 진가를 따라할 수 있고 숭배할 수도 있지만, 그의 위엄을 범할 수는 없었다. 만일 진가가 다리 위에서 홀로 달을 즐긴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리 아래에서 달을 즐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가는 진가였다. 결코 두 번째는 있을 수 없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호구에서의 일전 이후, 진가는 강남의 청년들이 우러러보는 영웅이 되었고, 또 소녀들이 꿈속에 그리는 우상이 되었다.

(4)

당연히 진가는 전사사(田恩思)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대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