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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회랑

고룡古龍

by 와룡씨 2007. 2. 6.

 본명은 웅요화(熊耀華1937~1985)이고 중화민국 26년 생이다. 강서사람이며, 어려서 부모와 이별하고 대만담수대학 외국어과를 졸업하였다. 소년시절에 고금의 무협소설과 서양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

 대만의 최고의 무협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이름은 대만 사대명가중 한명이 되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김용의 뒤를 계승하였다고 떠받들어졌고, 무협계 불세출의 기재로 여겨졌다. 그 <인재강호, 신불유기(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그 몸은 자신 것이 아니다)> 와 <무검승유검(검이 없이 검을 이긴다)> 의 말은 모두 한번에 퍼져나갔다.

 고룡의 붓 아래 그려지는 인물들은 극히 생동적이다. 부귀하고 천하기도 하고, 각기 유소위유소불위의 원칙을 지킨다. 그 문장은 특이하고 생각도 교묘하다. 전통의 문제를 현대에 끌어와 신파무협등의 여러 가지 특색을 한데 섞어둔 것이다. 영화의 수법으로 간결하고 세련된 언어를 사용했으며 풍부한 철학의 무협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는 풍격이 있고 소탈하고 얽매임이 없을뿐 아니라 우아한 아름다움이 바탕이 되어있고 사람의 귀와 눈을 새롭게 하여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960년 처녀작인 <창궁신검>을 발표했다. 이때까지는 아직 전통적인 무협소설형식을 따라서 내용은 볼거리가 없었다. 이후 <고성전> <상비검>등의 작품은 4자의 단구로 장을 구분하고 신형식의 필법을 창제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에 육어의 <소년행>속 '신형식무협'을 보고 문장의 풍치를 계발했다. 이때 고룡은 시의로 여유를 갖는 자신만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했다.

  때로는 사람을 놀라게 하여, 이때부터 모방을 버리고 기개와 '빠름'이라는 것으로 대변된다. 이것은 곧 고룡이 '신파' 무협소설을 건너 '간단화'의 세계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대기영웅전>이 여전히 환주루주의 소설인물을 베낀 듯, 환상적인 면이 농후하지만 <절대쌍교> <철혈전기> <소십일랑> <다정검객무정검> <유성호접검>에서 <칠종무기>등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육소봉>계열과 <변성랑자> <천애명월도> <삼소야의검> <백옥노호>등 고룡은 '신파'무협소설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홀로 십년간을 걸어온 것이다.
 
  고룡은 구파의 무협소설 격식을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했으나 점점 '위신이신, 위변이변(갈수록 새롭고 갈수록 변화하다)'의 창작 난제에 빠졌다. 고룡은 2번 결혼을 했으나 모두 헤어졌다. 아들이 세명 있었으나 모두 웅씨가 아니었다. 이것은 모두 고룡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었다. 그의 호방한 성격에 더해 아무렇게나 술을 마시고 결국 간을 상했다. 1976년이후에 고룡의 작품은 강하일하의 느낌을 안겨주는데, 이것은 위에서 얘기한 원인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룡은 유작 <엽응도국>을 쓰면서 말하길,
  "나는 최소한 오년정도는 살아서 '대무협시대'를 완성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나는 이것이 무협소설의 지위를 한단계 올려줄 작품이 될 것임을 믿는다. 또한 이것은 나의 대표작중 하나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우리는 그가 아직도 뜻이 있으며 마음이 있고, 신 무협문화를 창조할 여력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돌연 사망하였으니 이것은 우리의 손해요, 또한 무협문단의 커다란 손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