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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회랑

양우생梁雨生

by 와룡씨 2007. 2. 6.

양우생, 본명은 진문통. 1922년 광서 몽산의 독서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시와 글을 읽으며 괜찮은 전통교육을 받았다. 1943년, 한떼의 학자들이 난을 피해 몽산으로 왔다. 태평천국 역사 전문가, 글과 돈황학 및 시서화에 저명한 요종이도 그의 집에 머물렀다. 양우생은 그들에게 역사와 문학을 배웠으며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항전이 승리하고 그는 곧 광주 영남대학에 입학하고 국제경제를 배웠다.
1949년 홍콩에 머물며 <대공보>에서 일했다. 그는 평소에도 무협소설을 읽기를 즐겼으며 종종 사량용을 찾아가 교류했다. 1952년 이 저명한 무협광이 무협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 무협소설의 태동이 된 <용호두경화>이다. 수필을 쓸때의 이름은 양혜여였는데 평소 백우와 관계가 깊었으므로 이름을 양우생이라고 하게 되었다. 1984년 "봉도", 모두 32년 35부 160권, 1000만자의 글을 썼다. 무협외에도 양우생은 산문, 평론, 수필, 기화를 썼으며 필명도 진로, 풍유녕, 이부인등이 있고 저작으로는 <중국역사신화>, <문예신담>, <고금만화>등이 있다.

양우생, 김용의 공적은 무협소설에 일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신파"는 그들만이 말한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승인된 것이었다. 구 무협소설의 열기가 비록 대단했으나 신 문학도 가볍게 볼수가 없었다. 당시 우아하기로 유명한 신문이며 소식 전하기로 유명한 신문들이 모두 무협의 독자를 가졌는데 지식인이 부족했다. 중요한 것은 하층의 '비문맹인들'이었다. 당시 무협소설의 지위는 비하여 말하자면 강호를 유랑하며 예술을 파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었다. 보는 사람은 비록 많지만 시종 명문정파는 아니었다. 김용과 양우생이 나타나자 그 국면이 바뀌어 각종 유명한 신문들이 모
두 다투어 실으려고 했다. 독자들도 사회각층에 널리 분포되었고 홍콩, 대만, 싱가폴, 마카오등지에 퍼져나갔다. 이로써 무협소설의 새로운 역사를 열게 되었다. 이후에 무협소설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무르익었으며 전통학과 비슷하게 취급되었다.

양우생은 무협소설 방면에서만 대가일뿐 아니라 무협을 평하는 방면으로도 대가였다. 1966년 홍콩 <해광문예>에 한편의 유명한 <김용 양우생 합론>을 발표했다. 사실 모두 양우생이 쓴 것이었다. 그는 "양우생은 명사의 기풍이 짙으며(중국식)김용은 현대의 '양재자'이다. 양우생은 중국 전통 문화(시사, 소설, 역사등을 포함)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김용은 서방문학(영화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라고 했다. 이 관점은 현재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77년, 그는 새로 작가들을 추가하여 <문예적 관점으로 무협소설을 보다>를 써냈는데, "무(武)가 없을수는 있으나 협(俠)이 없을수는 없다"는
관점을 내걸었다. 1979년, 그는 영국 버밍엄에서 저명한 수학가인 워러갱(??)과 만났다. 그는 양우생의 <운해옥궁록>을 보고 양우생에게 무협소설이 성인동화의 관점이 아니라고 했다. 양우생은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여 중국 작협 제 4대 대표대회에 출석하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 무협소설을 위해서 커다란 기염을 토한것이라고. 어떤이는 양우생을 위해 시를 지었다.
 
    金田有奇士,俠影說羽生.
  南國棋中意,東坡竹外情.
  橫刀百岳峙,還劍一身輕.
  別有千秋業,文星料更明.
 
"금전"이란 태평천국이 기의한 금전촌이며 바로 그의 고향인 몽산 부근이다. "협영"은 <평종협영록>이다. "기중의"는 그가 쓴 기화를 말한다. "죽외정"은 소동파의 "사는곳에 대나무는 없어도 되지만 먹을 때 고기가 없어선 안된다"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양우생이 고기를 좋아하고 특히 비계를 좋아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환검"은 그의 <환검기정록>에서 따온 것이며 그가 금분세수(금 세숫대에서 손을 씻음:은퇴)하고 봉도괘검(칼을 봉하고 검을 걸어둠:은퇴)하여 무협을 쓰지 않았음을 말한다. "별유천수업"은 그가 태평천국의 역사소설을 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양우생은 신파무협소설의 개산 시조요, 작품은 대부분 수준이 있다. 무협소설의 새로운 격조를 열었고 이후에 이탈리아로 이주한 이후에도 역사에 대한 마음은 계속 커져 새로운 수준을 일궈내었던 것이다.